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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 프랑스혁명, 유럽이 전쟁터로 변하다
프랑스, 방어전에서 승리하며 유럽의 강자 떠올라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0/09/01 [10:26]

[김영수 잡학여행] = 파리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1789년 7월14일)한데 이어, ‘국민의회’의 봉건제폐지 선언(8월4일), 프랑스 인권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8월26일)으로 프랑스대혁명은 막이 오른다.


프랑스대혁명으로 프랑스의 절대왕정이 무너지자 유럽의 지배층(왕족, 귀족, 승려)은 프랑스혁명의 이념이 신분제를 무너트려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것을 두려워했다. 또 혁명의 와중에 극도로 혼란한 프랑스를 점령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 프랑스대혁명은 어떤 한 시점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전쟁을 거치면서 완성된다.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프랑스혁명전쟁은 프랑스대혁명, 대혁명 이후 유럽국가의 대프랑스동맹전쟁(제1차 1792년2월~1797년, 제2차 1798년~1802년, 제3차 1805년 4월~1806년), 이후 나폴레옹의 유럽전쟁(1815년 워털루 패전)으로 이어지는 오랜 전투기간과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전쟁이다.


이글에서는 대혁명의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 위주로 서술한다. 이 전쟁으로 나폴레옹이 역설적으로 황제에 등극하기 때문이다.

 

 

1) 필니츠선언, 프랑스 혁명파의 분노를 일깨우다
프랑스혁명으로 유폐상태이던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를 빠져나가려다 붙잡히는 사건(바렌 사건, 1791)이 발생하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프랑스의 망명왕당파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필니츠선언 Declaration of Pillnitz, 1791년 8월27일)한다.
프랑스는 필니츠선언을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왕국의 입법의회 투표(1792년 4월20일)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온건파였던 지롱드당에서 주전파가 나타날 정도로 프랑스는 분노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대 오스트리아 선전포고(1792년 4월20일)에 이어 대 프로이센 선전포고(1792년 7월8일) 한다.
당시 외무장관이기도 한 뒤무리에 장군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대한 침공을 준비하지만, 혁명의 여파로 프랑스군대는 지휘계통이 거의 무너진 상태였다. 귀족출신 장교들은 혁명이후 숙청당하거나 도주해 지휘부 공백상태였다.
프로이센의 브라운슈바이크의 군대(브라운슈바이크 4만2000, 오스트리아 2만9000, 헤센 6000)가 라인강 근처 코블렌츠에 집결, 프랑스 본토로 침공을 시작(7월)한다. 군사공백이나 마찬가지였던 뒤무리에의 대패(7월초)에 이어, 롱위(8월23일)와 베르뎅(9월2일)을 점령당한다.

▲ 프랑스의 봉건제 종식선언은 유럽의 이웃나라에게 위협이 됐고, 프러시아 등은 프랑스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2) 브라운슈바이크, ‘프랑스는 역도의 무리’ 선언
브라운슈바이크는 승전의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공화국은 국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역도의 무리’로 규정한 성명을 발표한다.
혁명정부는 뒤무리에의 패전 이후 긴급선언(7월11일)으로 병사를 징집하고, 부대를 새로 편성하고, 군대를 재조직했지만 전황은 여전히 프랑스에 불리했다. 과격주의자인 자코뱅파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 정권을 잡으려는 시도도 한다.
패전의 원인이 왕족과 귀족 탓이라고 생각한 시민들은 튀일리궁으로 몰려가 루이16세의 퇴위를 요구했고, 국왕일가는 의회로 도망치지만 결국 시민들에게 넘겨졌다(1792년 8월10일 봉기).
이 혼란의 와중에 프랑스의 뒤무리에(첫 전투에서 패한 그 장군이다)-켈레르만은 혁명의용군을 이끌고 발미에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퇴한다(발미전투 9월20일).
발미전투는 승자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힘든 전투였지만, 프랑스 입장에서는 혁명의용군으로 침공하는 적의 세력을 일단 저지했고, 침략군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길줄 알았던 전투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3) 발미전투 승전과 함께 프랑스 제1공화정 수립
발미전투에서 승리한 그날, 입법의회는 해산되고 프랑스 제1공화정이 수립된다. 프랑스 제1공화정은 유럽의 현존정부를 전복하려는 모든 인민들에게 원조를 제공하겠다(11월)는 선언을 하고, 이듬해 루이16세를 처형(1793년 1월21일)한다.
루이16세의 처형은 유럽을 충격에 빠트렸다. 프랑스공화국은 ‘국왕을 처형한 놈의 나라’가 됐고, 대프랑스 동맹(프로이센+오스트리아)에 스페인이 새로 참가한다.
이 와중에 프랑스공화국은 영국과 네덜란드공화국에 선전포고(2월1일)하고 국민개병제를 위한 30만명 징병령을 발표(1793년 2월)한다. 이어 국가총동원령을 발표(7월), 18세~25세 독신남성을 징병해 장부상으로는 150만병력(1794년 8월)을 확보한다. 실제 병력은 80만 정도(당시 프랑스 인구는 3000만 정도)였다.

 

 

4) 공화파, 툴롱의 왕당파 몰아내며 강경 선회
프랑스 제1공화정은 온건파인 지롱드당이 집권했지만, 과격파인 자코뱅파가 전복을 시도(1793년 5월31일)한다. 그러자 지롱드당 지지세력인 리옹, 아비뇽, 님즈, 마르세유가 반란을 일으킨다.
여기에 툴롱에 근거를 둔 왕당파가 혼란을 틈타 툴롱에서 혁명파들을 축출하고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받아들인다. 툴롱은 프랑스 해군의 지중해 기지로 혁명파입장에서는 제해권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프랑스 공안위원회는 결국 툴롱 수복에 나섰고, 여러번의 실패 끝에 뒤고미에의 혁명군이 툴롱을 함락(12월18일)시킨다. 전투경험을 쌓은 혁명군은 스페인령 산세바스티안 접수(1794년), 플랑드르 전역에서는 플로이루스 전투에 승리하면서로 오스트리아로부터 벨기에와 라인란트를 점령한다. 또 기어코 네덜란드공화국을 기습공격해 멸망(1795년)시킨다.
프로이센과 프랑스공화국은 바젤 평화조약을 체결(1795년 4월6일)한다. 조약은 라인강 서쪽의 영토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를 인정하고, 대신 프랑스가 점령한 라인강 동쪽의 프로이센 영토를 돌려받는 조건이었다.

▲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퍼져나가는 것을 두려워한 이웃국가들의 침략에 맞선 프랑스에는 전쟁영웅 나폴레옹이 있었다.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5) 나폴레옹, 오스트리아 격퇴하며 영웅으로 떠올라
툴롱전투에서 하급장교로 복무했던 나폴레옹은 파리에서 왕당파 군인들의 공화국정부 전복 사건을 진압한다. 이때의 성공으로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의 전선에 있었는데 혁명정부는 주르당-모로의 라인군과 이탈리아의 나폴레옹 군대를 움직여, 빈을 공격하는 작전을 수립(1796년)한다.
주르당과 모로가 각각 신통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는 가운데, 만토바요새를 공략하던 나폴레옹의 후미를 오스트리아군(1차구원군, 뷔름저)이 기습한다.
나폴레옹은 즉각 만토바 포위를 풀고, 기동력을 바탕으로 뷔름저의 후미를 공격했고, 뷔름저는 일단 만토바요새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원래대로라면 주르당-모로의 병력이 나폴레옹을 엄호해야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전력을 상실한 상황이라 나폴레옹은 홀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해야 했다. 뷔름저는 만토바요새에서 호시탐탐 역공을 노리는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뷔름저를 구원하러 온 오스트리아군을 상대(2차구원군)해야 하는 위기에 처한다.
안팎의 오스트리아군(7만)에게 패퇴를 거듭하던 나폴레옹(3만)은 국면전환을 꾀하기 위해 오스트리아군 군량기지 아르콜을 기습공격, 함락시킨다. 대군이었던 탓에 군량보급에 문제가 생긴 오스트리아군이 주춤하던차에, 오스트리아는 또 다시 티롤에서 징집중이던 알빈치를 만토바 구원에 투입(3차구원군)한다.
오스트리아 1차, 2차구원군이 군량부족으로 비협조적이었던 틈을 타 나폴레옹은 알빈치군을 격파(리볼리전투)하고,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지역을 장악(후방 확보)한후 만토바에 총공세를 펼쳐 항복(오스트리아 1만8000)을 받아낸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로 진군하고, 프랑스의 모로-호셰 혁명군이 오스트리아로 진군하자, 2개방면에서 전선을 유지할 자신이 없던 오스티리아는 나폴레옹에게 평화조약을 제의하고 캄포포르미오에서 평화조약을 체결(1797년 10월17일)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지중해와 인도에서의 영국입지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이집트를 침공(1798년)하고, 이 때문에 오스만제국도 프랑스와 전쟁에 휘말린다.
앞서 스페인해군(코르도바)은 브레스트 주둔 프랑스해군과 합류하려 했으나, 영국해군(저비스)의 저지로 실패(생빈센트곶 해전, 1797년 2월)한다.

 


6) 영국주도 2차대프 동맹, 패전으로 와해
전쟁의장기화에 지친 유렵은 스웨덴의 중재로 프랑스와 대프랑스동맹군 강화회담(제2차 라슈타트회의)를 개최하지만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시간을 끌면서, 나폴레옹에게 각개 격파당한 대프랑스동맹군이 재정비할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영국의 주도로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제2차대프랑스동맹을 결성(1799년)하고, 이집트원정에 나섰던 나폴레옹이 귀환했다는 소식에 영국-러시아연합군은 홀란드의 북쪽 끝단에 상륙한다. 프랑스는 군대를 파견, 네덜란드 방어전(카스트리쿰 전투, 10월6일)에서 영국-러시아연합군에 승리한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혁명군이 패배가 이어지던 와중에 프랑스의 마세나가 2차취리히전투(1차전투에서는 병력열세로 패배)에서 대승을 거둔다.
참패를 당한 러시아는 동맹에서 이탈(1799년)하고, 이집트에서 귀환한 나폴레옹은 자신을 제거(또는 약화)하려 했던 총재정부를 엎어버리고 통령정부(3명)를 수립, 자신이 제1통령으로 등극한다(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통령에 오른 나폴레옹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기 위해알프스산맥을 넘어(이때,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가 나왔다)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군 후방에 도착(1800년)했다.
나폴레옹은 마렝고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 뤼네빌조약(1801년 2월9일)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조약은 프랑스의 새로운 공화정체제를 인정받고, 프랑스의 라인란트 병합 재확인, 오스트리아의 토스카나 대공국 프랑스에 양도 등을 담고있다.
대프동맹의 주축이었던 영국은 해전에서는 성과를 거뒀지만, 전체적으로는 별무신통한 결과가 나오자 주전파 피트가 주화파 애딩턴으로 갈렸고(1802년), 영국과 프랑스는 아미앵조약(1802년)으로 일단 전쟁을 종결한다.

기사입력: 2020/09/01 [10:26]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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