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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 특권층 ‘세금 거부’가 대혁명 촉발
루이16세 삼부회 소집…귀족성직자, 평민계급 무시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0/09/07 [06:49]

[김영수 잡학여행] = 프랑스대혁명의 전개과정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자신이 곧 국가라고 주장하며 절대왕정을 구축했던 태양왕 루이14세의 프랑스는 유럽의 강대국이었다.


그랬던 프랑스는 대규모 재정지출 등으로 국가가 파산상태에 이르면서 여러 문제점이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또 이 당시는 ‘소빙하기’로 전지구적으로 온도가 내려가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식량난마저 돌던 시기였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1760~1840)의 태동기였고, 루소가 ‘사회계약설(1762)’을 통해 불평등한 신분체제의 타파를 부르짖던 때와 맞물려 프랑스대혁명이 불붙은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삼부회에 대한 것과 루이14세, 15세, 16세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다.

 


1) 루이14세(1638년 9월5일~1715년 9월1일)
①재정 전문가 콜베르 기용,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 시행. 상업중심의 경제정책으로 프랑스를 유럽에서 가장 강한 국가로 성장시켰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태양왕’ 칭호.
②말년 들어 베르사유궁전 건축, 팔츠전쟁,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 등으로 재정 낭비.

 

▲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 절대왕정을 구가하던 태양왕 루이14세의 영광을 짐작할 수 있다.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2) 루이15세(1710년 2월15일~1774년 5월10일)
①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과 7년전쟁(프랑스-오스트리아 VS. 영국-프로이센)으로 북아메리카와 인도에 있던 식민지의 대부분을 영국에게 빼앗겨(1763년).
②영국이 너무나도 미웠던 프랑스는 미국독립전쟁(1775년~1783년)에 순전히 영국을 혼내줄 목적으로 미국 지원했다가 왕실재정 파탄상태.

 

▲ 시대를 쫓아가지 못한 쇠락한 권력(왕권)의 말로는 비극이다. 루이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경기도민뉴스

 

 

3) 루이16세(1754년 8월23일~1793년 1월21일)
①왕실재정난 타개를 위해 평민(제3신분)만 냈던 세금을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에게도 거두려는 재정개혁 시도했으나, 좌절.
②파리시민, 개혁요구하며 베르사유 궁전 난입(1789년 10월5일), 포위하자 튈르리 궁전으로 도피.
③파리를 빠져나와 동부국경으로 도주하려다가, 교외지 바렌의 주막집 주인이 동전에 새겨진 얼굴의 주인공(자신의 얼굴을 화폐에 새긴 것이 오히려 지명수배 전단지 역할을 했다)인 것을 알아채고, 신고해서 붙잡혀서 파리로 송환(1791년 6월20일).
④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1792년 4월)의 와중, 파리민중과 지방의용군이 튈르리궁 점령. 루이16세가 외국과 반혁명음모 꾸몄다는 증거가 나타나면서 국민공회에서 표결에 따라 사형집행(단두대).
⑤루이16세의 왕비가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1755. 11.2~1793. 10.16)다. 사치와 허영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후대의 연구는 대부분 날조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역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 비극적 삶으로 온갖 작품에 등장하는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역시 단두대 처형을 받는다.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4) 프랑스의 삼부회(États généraux)
①삼부회는 프랑스 필리프4세가 교황 보니파시오8세와의 분쟁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트르담 대성당에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1302년 4월10일)시킨 것이 최초로 일종의 신분제 의회의 역할을 했다.
②필리프4세는 잉글랜드(에드워드1세)와의 전쟁(1294년~1303년, 플랑드르 전쟁(1302년~1304년)으로 국방비가 필요했다.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그동안 면세특권을 누리던 프랑스 교회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1296년)하자, 교황 보니파시오8세가 반발했다. 삼부회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교회를 꺾기위해 진행한 정치적 결단의 하나였다.
③여러 세력의 중재로 교황과의 갈등은 일단 봉합됐지만, 또 다시 갈등이 일어나자 필리프4세는 군대를 동원해 당시 아나니라는 곳에 머물고 있던 보니파시오8세를 생포(아나니 사건, 1303년 9월7일)하고, 국왕의 권력이 교황의 권력보다 강력하다(카놋사의 굴욕과 대비)는 것을 세상에 알린다.

 

▲ 베르사이유 궁전.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④후임 교황 클레멘스5세는 프랑스 출신으로 프랑스 국왕의 강력한 간섭을 받아야했다. 로마로 가지 못한 채 프랑스에 체류하다가, 급기야 교황청을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이전(1309년)하기에 이른다. 이 아비뇽의 교황청에서 7명의 교황을 배출(1309년~1377년, 아비뇽의 유수)하면서 교황권 쇠퇴로 이어진다.
⑤삼부회를 소집한 주체가 국왕이고, 그 이유가 돈 때문이었으므로, 대체적으로 신임 국왕은 삼부회를 통해 돈을 즉위선물로 받았다. 샤를8세는 즉위식에서 삼부회를 통해 30만리브르를 받았다(1484년)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삼부회는 국왕이 세금 부과 등의 행위에 삼부회의 동의를 얻는 것을 일종의 권리로 여기게 됐지만, 프랑스가 절대왕정으로 변모하면서 삼부회는 열린 적이 없었다(1614년~1789년).
⑥루이16세는 재정난 타개를 위해 170여년동안 열린 적이 없던 삼부회를 소집(1789년)하지만, 표결에 차등을 둬야한다는 귀족ㆍ성직자 계급과 표결의 동등을 주장하는 제3계급(부르조아)이 충돌하면서 프랑스대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기사입력: 2020/09/07 [06:49]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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