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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 제3차 포에니 전쟁(BC149년∼146년)
로마史④ 로마, 숙적 카르타고 철저히 파괴 영원히 멸망시켜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0/10/16 [07:34]

[김영수 잡학여행] = 로마와 카르타고가 벌인 세번째 전쟁이자 마지막 전쟁이다. 로마는 이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다. 로마의 처절한 파괴로 카르타고는 폐허로 변하고 성안의 남은 주민들도 아프리카 강제 이주로 아예 형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된다.

 

▲ 번영을 구가하던 카르타고의 멸망은 한니발의 개혁을 받아들이지 못한 카르타고 기득권자의 반발도 한몫을 했다. 불세출의 명장 한니발도 정치에 눌려 결국은 음독자결로 생을 맺는다.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공식적으로는 1985년 1월에 종결됐고 볼수도 있다. 이탈리아 로마시장(유고 베텔레)과 튀니지의 튀니스(카르타고)시장(체드리 쿠리빈)이 이날 만나, 전쟁 종결에 서명, 공식적인 종전협정(무려 2131년만에)을 맺었다. 이 서명은 이탈리아와 튀니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이기는 하다.


700년의 번영속에 로마와 100년동안 세 번에 걸친 대전쟁을 벌인 카르타고의 최후는 비장하다. 3차 포에니전쟁에서 종군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훗날 로마의 개혁을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1) 카르타고, 막대한 전쟁배상금 고통
①2차포에니전쟁 이후 로마는 동쪽의 마케도니아 왕국, 일리리아, 시리아로 영역을 확대하고 히스파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반면 카르타고는 매년 200탈란트씩 50년간 물어야 하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에 고통받고 있었다.
②승전속에서도 로마에서는 2차포에니전쟁 때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했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나왔다. 끊임없는 카르타고 타도의 배경은 아프리카 지중해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해상무역으로 국력을 회복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③카르타고는 BC156년 이후 불과 5년만에 전쟁의 상처를 씻고 예전 못지않은 강한 국력으로 재성장한다. 당황한 로마는 카르타고를 약화시키기 위해 이웃나라 누미디아를 배후에서 조종, 끊임없이 카르타고를 침범하도록 한다.
2차포에니전쟁 패전으로 카르타고는 모든 분쟁은 로마의 간섭을 받아야 한다는 약점을 로마가 이용한 것이다.


2) 로마, 외교 국방 등 박탈하고 카르타고 괴롭혀
④로마의 후원을 업은 누미디아의 계속된 침입(BC151~BC149)에 결국 카르타고는 봉기한다. 누미디아와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 6만의 용병을 조직한 카르타고는 누미디아가 침공하자, 공세로 전환해 누미디아 영토로 진입한다.
⑤로마는 즉각 카르타고에 조약위반을 구실로 조사단을 파견했다. 로마 원로원은 카토 중심의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뉜 상태에서, 때마침 그리스에서 반로마 세력이 나타나자, 로마는 강경진압으로 돌아선다.
카르타고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로마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놓고 대립을 벌였지만, 두차례 참혹한 패전의 트라우마가 있는 카르타고는 온건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강화에 나선다.
⑥로마의 강화 사절단 책임자는 2차포에니전쟁에서 한니발을 격퇴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였다. 손자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모든 무기를 로마에게 넘길 것을 첫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때 내준 카르타고의 무기가 10만개가 넘었다고 한다.
무기를 모두 압수한 손자 스키피오는 두번째 조건으로 수도 카르타고를 파괴하고 모든 주민은 해안에서 15km 떨어진 곳으로 이주할 것을 내놓는다.

 

▲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로마는 카르타고를 멸망시켰지만, 종래는 그 자신도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당한다.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3) 사막 이주 로마의 요구에 처절한 저항
⑦로마의 조건은 카르타고의 완전한 멸망을 의미한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으로 먹고사는 카르타고더러 해안선에서 물러나라는 것은 사막지대에서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로마가 자신들을 아예 멸망시키려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카르타고는 나뭇가지, 성벽을 헐어서 마련한 투척용 돌, 심지어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석궁의 시위줄로 사용했다. 강화를 주장한 온건파는 모두 사형에 처했다.
⑧맨손밖에 없는 성안의 카르타고 시민(40만 추산)과 손자 스키피오의 로마 4만 정예병의 전투는 무려 3년이나 이어졌다. 카르타고로 들어오는 항구는 배를 침몰시켜 원천 봉쇄했다. 결국 카르타고를 함락한 손자 스키피오는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소금을 뿌려 영원한 불모지로 만들었다. 남은 주민(5만 추산)은 모두 노예로 뿔뿔이 팔아버렸다.
⑨포에니 전쟁으로 로마는 절정기를 구가하는 듯 보였지만, 내부는 이미 심각한 문제가 싹트고 있었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시민(자영농)이 전사하거나, 영농불능 상태로 시민들의 농지가 대지주에게 넘어간 것이다. 정복지에서 저렴한 농산물들이 유입, 그나마 남아있던 자영농도 붕괴한다.
결국 혼란을 수습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로마는 황제가 법위에서 칙령으로 통치하는 시대가 등장한 것도 포에니 전쟁의 결과중의 하나다.

 

 

서양에서 후대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친 나라를 꼽으라면, ‘로마’를 빼놓을 수 없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형제가 건국했다는 이 나라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으로 발전한다.
방대한 제국의 통치를 위해 로마(BC27~476년, 1453)는 종교적으로는 크리스트교, 정치적으로는 황제-원로원 체제, 철학적으로는 스토아학파(금욕주의), 학문적으로는 토목ㆍ건축ㆍ법학 등 실용주의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여기서는 △로마의 법제정 연혁과 의의 △카이사르(BC100~BC44) △포에니전쟁 △동서제국의 분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다.

기사입력: 2020/10/16 [07:34]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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