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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 알렉산더, 인류 최고의 정복자(1)
그리스 통합 발판삼아 대제국 폐르시아 정복
경기도민뉴스 기사입력  2021/01/23 [17:04]

[김영수 잡학여행] = 역사적으로 수많은 정복자와 군사지휘관이 있지만, 알렉산더 대왕을 뛰어넘는 정복자, 군사지휘관은 많지 않다. 알렉산더 대왕은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체계를 세계로 확산, 헬레니즘 세계를 건설, 오늘날 유럽문화의 원형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Alexander The Great, BC356년 7월20일~BC323년 6월10일)는 33년의 생애 동안 너무나 많은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있는 알렉산드로스3세(알렉산더 대왕)의 청동 기마상.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 경기도민뉴스



1) 페르시아전쟁 이후 그리스 내분 일어나
①당시 알렉산더가 속해있던 지중해 세계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논공행상을 거치며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갈등을 빚는다. 전쟁 직후 아테네는 델로스동맹으로 해상제국을 건설하지만, 다른 도시국가를 식민지 취급하면서 분란을 일으킨다.
②여기에 반발해 스파르타 중심의 펠레폰네소스동맹이 성립, 한때의 동맹이었던 아테네와 내전 비슷한 펠레폰네소스전쟁을 벌이면서 그리스는 내부부터 엉망으로 변해간다.
③아테니와 스파르타라는 두 강대국이 모두 힘을 소진한 상태에서, 새롭게 지중해의 패권을 잡은 국가는 그리스 북쪽의 테베(Thebes)였지만, 유능한 지휘관의 전사(에파미논다스, 펠로폰네소스 정벌 BC370~BC362 중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전사)로 짧은 시간의 전성기를 마치고, 무주공산으로 변한다.
④그리스의 한참 변두리이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2세가 테베를 점령하고, 그리스에 대한 압박을 가해오던 상황에서, 비록 한물갔지만, 동방에는 여전히 강력한 페르시아제국이 버티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2세가 아들 알렉산더와 함께 그리스를 압박하자, 앙숙이던 아테네와 테베는 어쩔수 없이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와 맞선다. 돈 많은 아테네와 용감한 테베의 동맹이었지만, 상대방이 워낙 강력(알렉산더)했다.
⑤알렉산더 이전 그리스 세계는 페르시아(다리우스1세와 아들 크세르크세스1세)의 침공을 아테네 중심 마라톤 전투(BC490), 스파르타 300결사대의 테르모필라이 전투(BC480), 살라미스 해전(BC480) 등으로 방어해낸다.
⑥이어진 플라타이아이 전투(BC479년 8)에서도 그리스연합군은 페르시아의 공격을 막아내고, 완전한 승전을 이끌어낸다. 대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 객기가 넘치다 못해 뻗치던 아테네는 로마의 턱밑에 있는 시라쿠사(아르키메데스의 도시로, 한참 이후 최강 로마의 공격도 1년 넘게 방어해낸 바로 그 도시다) 점령을 시도하다가 실패, 국고를 탕진하는 등 자멸의 길을 걷는다.

 

▲ 알렉산더 시대의 중장보병의 기본무기 장창과 방패.     © 경기도민뉴스



2) 알렉산더, 최강 동성애자 부대 격파
①전쟁을 하려면, 일단 사람이 필요하다. 칼, 창, 활, 방패, 갑옷도 있어야 한다. 군량도 있어야 한다. 진채를 세울 목재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을 운반해줄 보급(소, 말, 노예 등)도 필요하다. 필리포스2세와 알렉산더의 목표는 그리스 세계의 통일이 아니라, 페르시아 원정을 명분으로 내세워 그리스 세계의 동의를 받아낸다. 진정한 의도가 세계정복이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서는 보급기지가 필요했고, 그리스는 반드시 필요한 후방기지였다.
②필리포스2세가 이끄는 중장보병과 알렉산더가 이끄는 기병대는 카이로네이아 전투(BC338)에서 아테네-테베 동맹군을 격파하고, 관대한 항복조건을 제시한다. 패배한 아테네는 이를 받아들이고, 마케도니아 중심의 코린토스 동맹이 성립한다.
③당시 테베의 중장보병은 테베신성대(히에로스로코스, Hieròs Lókhos)라는 150쌍의 동성애자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다. 고르기다스가 창설(BC378)한 이 부대가 동성애자를 구성원으로 삼은 것은 ‘연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테베신성대는 당시 그리스 최강이었다.
④물론 알렉산더와의 전투에서 300명중 254명이 전사하면서, 명맥이 끊어졌다. 테베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없는 개방적인 도시였다. 테베의 보이오티아 지방은 헤라클레스 숭배가 활발했는데, 전설은 헤라클레스가 소년 성애자였던 것으로 전한다. 헤라클레스의 전설이 깃든 이 지역은 남성 동성애자 커플이 서로의 사랑을 맹세하는 장소로도 유명했다.
⑤그리스문화를 받아들인, 로마가 유독 거부감을 나타낸 것이 바로 그리스의 동성애 문화였다. 카이사르는 생애 내내 동성애자라는 의혹과 대머리라는 비아냥을 들었는데, 다만 아주 친밀한 측근들만 좋은 분위기속에서만 카이사르에게 대머리 동성애자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⑥알렉산더와 부친은 카이로네이아 전투(BC338) 이후, 그리스의 폴리스 대부분을 정복한 다음 코린토스에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반페르시아 연합이 결성한 것처럼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연합(Hellenic Alliance)’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필리포스2세는 연합의 이름을 헤게몬(Hegemon, 최고 사령관)이라고 명명하고, 페르시아에 대한 복수전을 선언한다.

 

▲ 알렉산더 대왕의 전투장면을 묘사한 삽화.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경기도민뉴스

 

3) 알렉산더, 마침내 세계 정복전쟁 나서
①아버지 필리포스2세는 페르시아 원정을 앞두고 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자신의 경비대장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BC336)당한다. 필리포스2세의 죽음에 왕국 내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지만, 알렉산더는 신속하고 무자비하게 반란을 진압하고 고대하던 페르시아 원정(BC334)에 나선다.
②한물갔다고는 하지만, 페르시아는 여전히 지중해(이집트 포함)와 인도 북부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닌 최대의 제국이었다. 비록 신흥강국 마케도니아지만, 상대하기에는 벅찬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부친 필리포스2세가 수립한 ‘망치와 모루 작전’을 구사하기 위한 군대의 조련에 힘썼다.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철저한 척후활동을 벌였을 것이다. 이를 위한 전령 체계도 남달랐을 것이다.
③후대의 역사 또는 전쟁사학자들이 놓치는 부분이 바로 연락체계인데, 현대처럼 무전기나 난수표체계가 없던 고대전쟁에서도 통신체계는 중요했다. 소정방이 김유신에게 보낸 암호문도 ‘난새와 송아지(칠중하 전투)’였고, 원효가 퇴각신호로 해독했기에 더 이상의 손실이 없었다. 전령이 새어나가 치명적 타격을 입은 생생한 예로는 한니발의 동생 하스두르발의 패전(메타우루스 전투, BC207)에서 찾을 수 있다. 전령이 로마군에 붙잡히면서, 형 한니발과 연합하려던 동생 하스두르발은 로마군에 격파당하고, 한니발 일생일대의 위업도 반쪽에 그친다.

기사입력: 2021/01/23 [17:04]  최종편집: ⓒ 경기도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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